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안 리 (문단 편집) == 유년기와 [[성심여자중학교|성심여자중]][[성심여자고등학교|고등학교]] 입학 == 조안 리의 본명은 이영자([[李]][[英]][[子]])로,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모 경제신문사의 편집국장이었고, 형제로는 5살 위의 오빠와 5살 아래의 여동생 이영숙(李英[[淑]])이 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광복]]을 맞이했고, 유아기에 [[한국전쟁]]을 겪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공부를 빼어나게 잘했지만 몸은 썩 건강하지 못하여 체육은 잘하지 못했고[* 체육시간에는 거의 열외되어, 다른 아이들이 운동하는 것을 견학하며 보냈다고 한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에는 별로 취미가 없으며 혼자서 책 읽기를 좋아하는 내향적인 소녀였다. 훗날 조안 리는 자신의 학창시절 모습에 대해 ‘그늘 아래의 외톨박이’라고 묘사하며 회상했다. 당시 공부를 잘하는 여학생은 한국 최고의 명문학교인 경기여자중학교와 [[경기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로 진학하는, 일명 ‘[[KS#s-3]] 마크’[* 남학생은 경기중학교-[[경기고등학교]]-[[서울대학교]]. 경기중과 경기여중은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면서 1971년 [[폐교]]되었다.]라는 코스를 거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따라서 [[국민학교]]에서 내내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이영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학교와 가정과 주변 사람들 모두가 기대했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학교 입학지원서를 제출하기 불과 며칠 전에 그녀는 완전히 마음을 바꾼다. 우연히 친구를 따라 가벼운 마음으로 구경해본 [[성심여자중학교|성심여자중]][[성심여자고등학교|고등학교]]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당시 개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설학교였던 성심여중에 진학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새로 지어져 깔끔하면서도 아늑한 건물들, 아름답고 성스러운 분위기의 [[용산예수성심신학교|교내 성당]]과 [[수녀원]], 예쁘고 깜찍한 모양새의 [[교복]], 검은색 [[수도복]]과 [[베일]] 차림의 서양인 수녀들[* [[1950년대]] [[한국]]에서는 외국인을 그리 쉽게 볼 수 없었고, 아직 [[한국 가톨릭]]의 교세도 그리 강하지 않았다. 따라서 ‘[[수도복]] 차림의 서양인 수녀’란 대단히 신기한 존재였다. (다만 오늘날 [[성심수녀회]]의 수녀들은 수도복이 아닌 일반 사복을 입는다.)] 등등, 성심여중고의 모든 풍경들은 12세의 어린 소녀였던 이영자에게 마치 [[동화]] 속의 풍경처럼 신비스럽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당연히 그녀가 재학 중이던 [[서울혜화초등학교|혜화국민학교]]의 선생님들[* 당시 [[국민학교]]에서는 ‘몇 명을 경기중/경기여중에 진학시켰는가?’가 가장 중요한 실적이었으므로.]과 부모님은 깜짝 놀라서 다들 반대했으나 그녀는 끝끝내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고, 결국 원서접수 마감 직전에 겨우 입학원서를 제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영자는 우수한 성적으로 1958년 성심여중에 입학했고, 1961년에는 성심여중을 졸업하고 같은 재단의 성심여고로 진학한다. [[용산구]] 원효로에 위치한 성심여중고는 [[가톨릭]] [[수도회]]인 [[성심수녀회]]에서 설립한 [[미션스쿨]]이었다. 교육사업을 주로 하는 성심수녀회는 전세계에서 성심학교를 운영하고 있고, 한국에도 성심여중고뿐 아니라 성심국민학교(여학교)[* 1962년 개교, 1982년 폐교]와 [[성심여자대학교]][* 1995년 [[가톨릭대학교]]와 합병되었다. (현 [[가톨릭대학교/성심교정]])]까지 설립했다. 초창기 소규모의 소수정예 [[사립학교]]였던 성심학교에서는 교사들이 학생 개개인에게 많은 관심을 쏟아주며 세세하게 지도했고, 성적 못지않게 인성교육을 중시했다. 또한 성심학교는 당시로서는 특별하고 획기적인 방법으로 [[영어]]교육에 힘썼다. [[원어민]] 교사가 글자와 문법보다 발음과 회화를 먼저 가르쳤고, 적은 수의 학생들이 원어민 외국인 [[수녀]]들과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자연스럽게 영어회화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특히 또래 아이들과 별로 어울리지 않았던 이영자는 외국인 수녀들과 영어로 대화를 많이 나누었고, 영어 [[원서]]도 즐겨 읽었으며, 그로 인해 다른 학생들보다 한층 더 영어를 잘하게 되었다. 그녀가 성심여중고에서 쌓은 영어실력은 이후 그녀에게 큰 자산이 되었으며, 서강대에 진학한 이후로 무엇보다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신부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성심여중고 시절 이영자는 교장 주매분([[朱]][[梅]][[芬]])[* [[피천득]]의 수필 [[인연(수필)|인연]]에 등장하는 ‘주 수녀님’이 바로 주매분 수녀이다.] 수녀로부터 각별한 보살핌과 총애를 받았다. 이영자는 교장실에 드나들면서 당시로서는 굉장히 희귀하고 비싼 사무기계였던 [[타자기]] 사용법도 배웠고, 타자기로 문서를 작성하는 심부름을 도맡아 다른 학생들로부터 부러움과 시샘을 동시에 잔뜩 받았다. 그리고 이때 익힌 타자 실력은, 훗날 그녀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직장을 구하여 가난한 신혼살림을 꾸려가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어준다. 성적은 더없이 우수했지만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아이’와는 거리가 멀고 자아([[自]][[我]])가 강했던 이영자를, 주 수녀는 있는 그대로 포용하며 이끌어주었다. 성심여중에 입학할 당시 이영자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지만 주 수녀는 그녀에게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고, 결국 이영자는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스스로 마음을 열고 자청하여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았다. 이때 ‘요안나’라는 [[세례명]]을 스스로 택했는데, 당시 그녀가 무척 좋아했던 성녀 [[잔 다르크]]의 이름 ‘잔(Jeanne)’을 [[라틴어]]로 발음한 것이며 [[영어]]로는 ‘조안(Joanne)’이라고 읽는다. 그녀의 [[주보성인]]과 새로운 이름 ‘조안 리’는 이렇게 정해진 것이었다. >무엇인가를 명명한다는 행위가, 때때로 그것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나는 나의 이름을 ‘조안’이라고 지으면서, 나의 삶도 잔 다르크처럼 ‘드넓은 세계에서 온갖 고난들을 극복하면서 용감하게 살아가는 여자의 삶’이 되기를 기원했다. 나는 내가 지은 나의 이름을 사랑한다. 나는 나의 이름이 표상하는 바처럼 살아가기를 열망했고, 또한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다만 그때는 몰랐다. 잔 다르크가 오직 [[성녀]]로 추앙받는 영광과 명예만을 누린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너무도 빼어난 존재였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시기심 많고 사악한 무리들의 모함에 휩쓸려 결국에는 [[마녀]]로 단죄를 받아야만 했다는 사실을. >---- >조안 리, [[자서전]]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1> 중에서 공부는 잘 하지만 사교적이지 못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외톨이를 자처했던 이영자 요안나에게, 주매분 수녀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고집불통인 큰딸을 통제하기 힘들었던 부모도 주 수녀에게 의지했다. 또한 요안나의 가정형편도 주 수녀가 요안나를 더욱 각별히 챙겨주게 만들었다. 본래 요안나 일가는 [[혜화동]]의 넓고 번듯한 [[기와집]]에서 [[가정부]]까지 두고서 제법 유복하게 살았지만, 요안나가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고 병석에 눕게 되면서 급속도로 가난해진 것이다. 아버지의 치료비와 생활비를 감당하느라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심지어 집을 팔고 [[금호동(서울)|금호동]] [[달동네]]의 단칸방으로 이사해야 할 정도로 어려워졌다. 가뜩이나 ‘귀족학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부잣집 딸들이 많았던 성심학교에서 행여 한창 [[사춘기]]인 요안나가 상처를 받을까봐, 주 수녀는 더욱 신경을 써주었다. 요안나가 중학교 3학년이 되던 1960년에 [[4.19 혁명]]이 일어났다. 1960년 4월 19일, 성심여중고에서는 요안나를 포함한 학생 몇몇을 불러 “오늘은 하교하지 말고, 교내 [[수녀원]]에서 하룻밤을 묵도록 해라.”라고 지시했다. 불려온 아이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어른들의 말씀을 잘 듣는 얌전한 아이’와는 거리가 멀었던 ‘말썽꾸러기’들이었다는 것이다. 어째서인지 자세한 설명이 없어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색다른 경험에 소녀들은 하룻밤을 재미있게 보냈고, 다음날에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학교 측에서는 위험한 시위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취한 조치였지만[* [[4.19 혁명]]에는 대학생뿐 아니라 국민학생, 중학생, 고등학생들도 여럿 참가했고, 목숨을 잃은 학생들도 많았다. 그중에는 요안나 또래의 여중생도 있었다. ([[한성여자중학교]] 2학년 진영숙)], 요안나는 ‘역사적인 현장’에 참가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학생들과 함께 거리 청소와 부상자 위문 등의 활동을 했다. 또한 4.19 혁명을 계기로 하여 처음으로 [[정치]]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훌륭한 정치로 역사에 이름을 날리고 나라를 편안하게 했던 왕이나 관료 등의 [[위인전]]을 탐독하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 일어난 [[5.16 군사정변]]으로 세상이 다시 한 번 바뀌었고, 그 변화는 고작 고등학교 1학년이던 요안나도 학교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불과 작년에 [[4.19 혁명]]으로 인해 주목받았던 집안의 딸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풀죽어버렸던 것이다. 그로 인해 ‘정치’와 ‘정치가’에 대한 요안나의 관심은 시들해져 버렸고, 그녀의 관심사는 ‘정치’보다 ‘인간’ 그 자체와 ‘인간의 심리’로 옮겨진다. 그러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그녀는 다방면의 [[독서]]를 했다. 고등학교 내내, 심지어 대학입시를 코앞에 둔 3학년이 되어서도 그녀는 온갖 책들을 읽곤 했다. 그리고 ‘[[심리학과]]에 진학하여 인간과 인간의 심리에 대해 깊이 탐구해보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